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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우 2016. 6. 10. 00:31




1. 

'편지'를 받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물론 스승의 날이나 종강 즈음에 학생회에서 주도하여 적은 형식적인 편지들은 종종 받았지만, 스승의 날 같은 이유도 없이 그것도 직접 쓴 것이 분명한 편지를 받는 것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는 그 편지봉투를 안주머니에 잘 챙겨 넣었다. 편지를 뜯어 읽어보기 전에 할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그리고 미안하네. 군과 약속을 했던 것 같은데 일이 바빠 깜빡했네. 얻어 먹기로 한 약속을 잊다니 어지간히 바빴던 모양이야."

약속 자체를 잘 잊는 편은 아니었는데 눈 앞의 학생과 약속했던 것이 있다는 게 얼굴을 보고서야 떠올랐다. 이번 학기 학생들은 교수에게 뭘 주는 걸 좋아하는지 툭하면 기프티콘에 비타민 음료에 초코 우유에 ... 이것저것 많이도 받았다. 하지만 일정한 수입이 없는 학생들에게 얻어 먹고 다니는 것이 말이 되던가? 교수 체면도 있고 해서 어쩌다 약속까지 잡게 된 학생에게 밥 잘 먹여 돌려보내자 싶던 차였다. 하지만 굳이 사겠다는 학생의 다음 약속을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대학에서 교수는 강의를 하고 학생은 강의를 듣고. 별 다른 감정의 교류 없이 그렇게 제자 아닌 제자들을 흘려보내는 매 학기들 사이에서 교수와 친해지고자 하고 교수님이 아닌 선생님이라 부르며 가깝게 대하는 학생에게 왜 그러냐며 밀어낼 필요는 딱히 없었다.









2.
전공 강의에 그것도 어렵다는 어학 강의에 타과생들이 잔뜩 수강신청을 한 것을 보고 맨 처음 들은 생각은 시스템 오류인가 싶었다. 그리고 인원 수 미달로 폐강이나 되었으면 했고, 실제로 첫 강의 때 타과생 배려 없이 진행할 테니 싫으면 알아서 수강철회를 하라고 단단히 못을 박았다.

상담이 들어온 것도 바로 그런 맥락이었다. 부족한 것 같아 수강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학생에게 그러라며 대답했고, 한 학기 잘 보내라고 돌려보낸 참이었다. 또 다시 상담이 들어왔을 땐 으레 수강철회 건이겠거니, 생각했고 연구실로 들어온 학생을 보며 철회에 대한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정작 학생의 입에서 나온 말은 수강 철회에 대한 말이 아니었다.

"제가 교수님을 좋아하는 거 같습니다. 어쩌죠?"

...뭐? 정말 생각지도 못한 말이라서 그 한마디만 뱉고 학생을 쳐다보았다. 얼굴이 눈에 익었다. 이번 학기에 하는 모든 강의에서 보는 얼굴인데 낯이 안 익을리가. 이름도 기억이 났다. 꼭 강의를 듣고 싶으니 강의 정원을 늘려달라고 문자까지 보냈던 학생 이름인데 기억이 안 날리가 없지. 이하균.

그래, 이 하 균. 이름을 떠올리고 그 다음으로 생각한 것은 저게 농담인가, 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학생이 교수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것은 교수가 존경하고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자연스러운 감정을 새삼스레 시간을 내어 상담 초반에 언급하는 것일까? 상담을 부드럽게 시작하려고 했다면 조금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대답을 하려던 찰나 학생은 재빠르게 말을 마무리하고는 인사를 했다.

"좋은 밤 되십시오!"

좋은 밤을 보내라며 인사를 하는 상대에게 무슨 말을 할까. 그저 원하는 대로 마무리 인사를 해주었다.

"그래. 좋은 밤 보내게."








3.
다음 날인가, 강의를 마치고 학생에게서 문자가 왔다. 강의 때 정한 조 구성원과 함께 날아온 문자에는 술에 취해서 한 말이고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이 붙어 있었다. 술 냄새는 안 났던 것 같았지만, 굳이 언급하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대했다.







4.
보조를 구하는 공고를 낸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보조가 정해졌다는 연락이 조교에게서 왔다. 보조들 이름 사이에는 학생의 이름도 있었다. 보조 이름들 사이에 학생의 이름이 있을거라곤 예상을 했었다.

학생과 대화를 하게 되었을 때, 학생은 보조로 '우연히' 일하게 되었다고 했다. 운명이라는 이야기도 했었지. 하지만 보조를 아르바이트로 구할 생각을 한 것은 순전히 학생의 말 때문이었다. 캠퍼스를 지나다가 학생이 중얼거리며 아르바이트를 구해야 한다고 하는 걸 들었었다. 그리고 연구실에 도착해 자료가 잔뜩 무분별하게 쌓여 있는 것을 보고 그 말이 생각났었다. 그래, 아르바이트. 일을 도울 사람을 구하면 되는 거지.

대부분 조교를 시키지만 조교는 대부분 저녁시간엔 대학원 강의를 듣는 사람이 대부분이니 조교를 시키는 것은 꺼려지고, 학생들 중에 적당히 지원자를 받아 시급을 주며 시키는 것이 좋겠다 싶었다. 어차피 그리 어려운 일을 시킬 것도 아니었으니 그거면 되었다. 근로장학으로 교내에서 일하는 학생들 시급과 비슷하게 시급을 책정해 조교에게 공고를 부탁했고, 그렇게 보조가 뽑혔다.

이 상황들을 모르는 학생의 입장에선 우연이겠지만 그건 우연이 아니었다. 서로 작용을 주고 받아 생긴 개연성 있는 상황들이었던 거지.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어서 저절로 자연스레 되는 일이란 없다고 생각한다네."

"우연이라는 것은 그 배경이 된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우연이라고 칭하는 것일 뿐이라네. 우연히 일어난 일이든 운명적으로 느껴지는 일이든 결국 의식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는 거야. 난 그렇게 생각하네."









5.
연구실에서 편지를 꺼내 펼쳐보았을 때, 편지의 내용은 전에 들었던 상담 내용에 시까지 적힌 내용이었다. 어학은 문학과 닿아 있지만 꽤나 다른데, 국어국문학 교수라니까 열심히 사랑에 관한 시를 찾아 꾹꾹 눌러쓴 정성이 보였다.

하지만 편지지에 꾹꾹 눌러 담은 그 감정과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다른 학생들보다 더 대화를 해봤고 마주치는 일도 많으며 어떤 일에는 이유와 결과가 되기도 했지만 그에 대한 건 사랑보다는 단순한 호의에 더 가까울 테였다.

거기다.

"10학번이면 91년생이던가?"

91학번인 자신이 어린 학생을 그리 생각했을 리도 없었다. 분명 치기어린 감정일테고, 착각일 터. 갑자기 몰아친 바람은 주변을 이리저리 흔들어 놓지만 결국 금세 지나가는 바람이다. 엉망이 된 주변 때문에 정신 없긴 하지만 결국 정리를 하고 제자리를 찾을 터였다. 꾹꾹 눌러쓴 정성과 감정은 이해했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무언가 딱히 해준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어디서 이리 마음이 끌려 고백 가득한 편지까지 쓰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인지하지 못하는 이유'가 분명 있어서였겠지만, 본인이 아니기에 알 수 있는 방법도 딱히 없었다.

그저 고백을 받은 사람으로써, 어른으로써 성실히 답하는 수밖에는.









6.
[ 군은 내게 정성들여 손편지를 써주었는데 나는 이렇게 문자 메세지를 보내게 되어 미안하네. 하지만 이런 건 답을 빨리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서 말이야. 정성스레 쓴 편지는 잘 읽어 보았네. 처음엔 군이 장난치거나 착각해서 좋아한다 말한 줄 알았다네. 그 마음을 곡해해서 미안하네.
그래도 여전히 존경의 마음을 착각한 것은 아닌지 조금 의심스럽긴 해. 하지만 사랑이라 말하니 그에 대한 답을 들려줘야 알맞겠지.
미안하네. 나는 군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지만 군을 사랑한다고는 할 수 없네. 그러니까 연애 대상으로서의 사랑 말이네. 
군을 싫어하거나 미워하거나 하는 건 아니야. 호의를 가지고 있으나 같은 호의가 아닐 뿐이지. 그렇다고 이런 일로 스스로를 괴롭히며 자괴감 갖지는 말게. 다른 감정이 죄는 아니지 않나.
Obliviate. 잊고 싶다면 잊어주겠네. 어차피 내일 저녁엔 또 내 연구실에서 봐야하지 않겠나? 불편하다고 일을 못하겠다고 하면 나도 군도 손해일 거야. 군이 원하는 대로 해줄테니 군 역시 원하는 대로 하게. 다만 그 마음에 응답하지 못해서 미안하군. ]
[ 내가 반하기엔 군은 아직 어리네. 정 마음에 열꽃이 가라앉지 않아 괴롭다면 혼자 얼른 성장해 어른이 되어 매력을 뽐내 보게. 혹시 모르지, 그 때엔 내가 반할지도. 안 그러나? ]
[ 좋은 밤 보내게. 내일 아르바이트 늦지 말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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